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대 로마/성문화 (문단 편집) === 쾌락주의적인 성문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just-how-raunchy-were-the-ancient-romans.webp|width=100%]]}}} || || '''[[폼페이|{{{#fbe673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모자이크|{{{#fbe673 모자이크}}}]].''' || '''고대 로마에서는 [[여장]]이 유행했다.''' 로마의 제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도 카프리 섬에서 연회를 즐기는 과정에서 직접 여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증손자이기도 하는 제3대 황제 [[칼리굴라]]도 가끔씩 미의 여신 [[비너스]] 분장을 하고 연회에 등장했다. 꼭 자신이 여장을 하는 게 아니라 예쁘장한 남자들에게 여장을 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폭군]]의 대명사 [[네로]]. 네로는 제 임신한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를 발로 차서 죽여버렸는데, 정작 죽이고 나서는 후회막심해서 아내를 많이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 사비나 황후와 닮은 사람을 발견했는데 하필이면 그게 여자가 아니라 남자 노예였던 포피루스였다. 죽은 아내와 똑 닮은 포피루스에 홀딱 빠진 네로는 그를 [[거세]]시킨 뒤 자유인으로 해방한 후 반쯤 아내로 삼다시피 했다. 네로는 또다른 자유노예들과 함께 침실에서 포피루스와 서로 즐기는 걸 좋아했다고. 고대 로마 최고의 지략가이자 장군으로 알려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타고난 [[바람둥이]]로 유명했다. 카이사르는 '만인의 남자'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바람꾼이자 [[유부녀]] 헌터'''였다. 오죽하면 카이사르가 지나갈 때 장난조로 사람들이 서로에게 '난봉꾼이 지나가니 [[마누라]]를 숨겨라!'라고 외칠 정도였다. 가장 유명한 연인은 [[고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였지만 이 외에도 삼두정치의 동료였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아내,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의 아내들까지 두루 후리고 다녔다. 카이사르가 더 대단한 것은 수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했다는 점인데, 그는 칼같이 업무와 여자관계를 구분했고[* 실제로 카이사르의 친자란게 확실한 카이사리온도 혈통 덕을 딱히 보진 못했다. 오랜 애인의 이들이자 자신의 사생아란 소문도 돌았던 브루투스를 이뻐했고, 본인의 혈육인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신 했지만 이 둘 모두 능력이 탁월한 것 때문에 중용한 것이다.] 자기 관리에 엄청나게 철저했다. 탁월한 관리 능력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그와 헤어진 다음에도 그를 싫어하는 여자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자식 복은 없었는지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카이사리온]]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 외에 젊은 시절 [[비티니아]]의 왕 [[니코메데스 4세]]에게 뒤를 개통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는 두고두고 그의 정적들에게 까일거리가 되었다. 카이사르의 가장 유명한 애인 소동은 기원전 63년 '[[카틸리나]]의 탄핵 사건' 당시 카틸리나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던 카이사르가 스캔들을 이용해 그 의심을 한번에 떨어버린 이야기이다. 원로원 회의에 참석 중이던 카이사르에게 웬 서신 한 통이 전해졌는데, 카이사르가 서신을 읽자 카이사르 반대파인 [[소 카토]]가 갑자기 일어나 카이사르가 읽고 있는 서신이 카틸리나 일파와 내통하는 증거[* 당시 카틸리나의 정치적 목표가 바로 채권자들에게 부채 전액 탕감을 강제하는 것이었는데 카이사르도 빚을 엄청나게 지고 있어서 한패라는 의심을 받았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카이사르가 지극히 사적인 서신일 뿐이라고 응수하자 카토는 더 기세등등해졌고 결국 카이사르는 그럼 카토 본인이 직접 이 자리에서 낭독하라면서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 서신의 내용은 사실 소 카토의 이복누이인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가 카이사르에게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소 카토는 한마디도 낭독하지 못하고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내던지며 "작작 좀 밝혀!"라고 소리쳤고 원로원 회의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책에 따라서는 "바람둥이 같으니라고!" 혹은 "(당신 편지나) 가져가, 이 바람둥이야!"라고 나오기도 한다. 어쨌거나 기세등등하게 카이사르를 몰아붙였다가 망신당하게 생겼으니 비난을 쏘아붙였다는 건 동일. [[매춘]]도 유행했다. '''당시 고대 로마에서는 상당히 매춘이 성행했는데''', 당시 매춘의 대명사로 알려진 위인이 바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 [[발레리아 메살리나]]다. 메살리나는 황후라는 고귀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성욕]]으로 유명했다. 뭔 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황제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메살리나는 애인들과의 성관계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밤마다 [[팔라티노 황궁]]을 빠져나가 고급 [[매춘부]]로 일했다. 심지어 이도 모자라서 천민들이 이용하는 최하급 매춘굴에서 놀았다는 소문이 돌기까지 할 정도였다. 또한 과감하게 [[남근]]의 고리가 달린 '리시스카'(Lisisca)라는 창녀로써의 예명까지 적힌 문패까지 걸어놓고 손님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사후 기록말살형을 받은 만큼 악의적인 소문일 가능성도 있지만 메살리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시대 학자인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메살리나가 로마에서 가장 악명 높은 매춘부를 선택해 밤샘 섹스 경쟁을 벌였는데 이 경쟁은 24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메살리나는 무려 '''1시간에 1명씩 총 25명의 남자들을 상대해서 섹스배틀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한 세대 후 로마의 시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55년~140년)는 자신의 시에서 매음굴에 다니던 시절 메살리나의 행각을 묘사했다. 그에 따르면 그녀는 황제가 잠든 것을 알았을 때 하녀와 함께 동행해서 매음굴로 떠나곤 했으며 그때마다 창녀의 두건을 쓰고, 팔라티노 황궁의 침대보다 매음굴의 매트를 선호했다고 한다. 거기서 그녀는 금발 가발로 자연스러운 머리카락을 감추고, 오래된 더러운 시트 냄새가 나는 창가에 들어가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젖꼭지에 금박을 입힌 것 외엔 벌거벗은 채 자신을 암컷 늑대라고 칭하며 손님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돈을 챙겼고 그런 다음 모든 남자들의 쓰다듬을 즐기면서 누워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포주가 창녀들 해산시킬때가 오면 그녀는 마지못해 그녀의 방에서 끝날때를 기다리며 가능한 마지막 시간까지 지칠때까지 섹스를 하며 욕정을 불태우고 황궁으로 다시 떠났다고 한다. 그는 메살리나를 창녀 황후(meretrix augusta)라고 칭했는데 이 부분은 로마의 정계에 간섭한 악명으로 이름 높았던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를 비교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주요 불륜 상대로 [[원로원]] 귀족들을 고르는 여인이 그 정도까지 막나가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소문이 시중에 돌 정도였다면 그녀의 성적 방종에 대한 당대 로마인들의 시각이 어땠을지 능히 짐작하게 만든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는 수식어답게 로마 시대에도 [[매춘부]]는 가장 흔한 직업들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매춘부 사이에도 위계가 있었다. 아름답고 교양있는, 단순한 육체미 뿐만 아니라 기예도 두루 갖춘 고급 매춘부의 경우 '''메르트리세스'''(''Mertrices'')라고 따로 불렀다. 이들은 정부에 공식 등록이 되어있는 사업자였고[* '아에딜레'라고 부르는 공공기관에 가서 매춘부임을 신고하고 이름과 인적사항을 적어내면 됐다. 한번 아에딜레의 인명부에 올라가면 무슨 짓을 해도 지울 수 없었다.] [[세금]]도 납부했다. 반면 단순히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싸구려 창녀들은 '''프로스티불라에'''(''Prostibulae'')라고 뭉뚱그려 불렀다. 사람 취급을 못받았던 '프로스티불라에'와는 달리 '메르트리세스'들은 꽤나 풍족하게 살았다. 메르트리세스들은 [[악기]] 서너 개쯤은 가뿐히 다룰 줄 알았고 아름다웠으며 재치도 있었다. 당연히 후원자들이 돈이나 팁을 그득그득 뿌려줬고, 덕분에 메르트리세스들은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는 것이지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뜻은 아니었다. 메르트리세스도 본질적으로는 창녀였고, 사회적으로는 낮은 위치에 있었다. 제 몸을 팔아서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배우]]나 [[가수]]도 천한 대접을 받았다.] 또 [[아우구스투스]]의 간통죄는 유부남과 합법적으로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창녀를 면제했는데 간통을 도덕성보다 법의 문제로 생각했던 일부 사회 저명 여성들은 간통죄로 기소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스스로를 창녀로 등록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창녀(메르트리세스)로 등록하고 활동할 용의가 있는 간통인은 적어도 그녀의 권리와 지위상실을 부분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었다.[* 출처: Adams, J. N., Words for "prostitute" in Latin, University of Koeln, 1983, p. 342] 매춘부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보통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으며, 아예 알몸으로 다니기도 했다. 만약 남성 전용의 옷인 [[토가]]를 입고 다닌다면 그건 100% 확률로 고급 매춘부였다. 후원자가 선물한 황금 장신구나 보석들을 주렁주렁 걸치고 다니는 경우도 흔했다. 화려한 장식이나 악세사리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기가 많다는 증거였기에, 매춘부들은 제 인기를 과시할 목적으로 일부러 극도로 호화롭게 차려입고 다녔다. 또한 매춘부들은 꼭 여자만 있는 것도 아니라서 남자 매춘부, 즉 [[남창]]들도 많았다. 그러나 모든 매춘부들이 화려한 삶을 사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매춘부들은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다. 당시 이들은 최소 14세, 심지어는 더 어릴 때부터 매춘을 강요받아 매음굴로 끌려들어간 사람들이었다. 매춘부들은 자유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노예 출신이었는데, 로마에서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사유 재산으로 취급받았기에 매춘부가 번 돈은 한 푼도 남김없이 주인에게 돌아갔다. 손님이 매춘부 본인에게 돈을 직접 쥐여주고 싶어한다면 가끔씩 예외를 두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런거 없었고, 매춘부들은 돈을 주인에게 빼앗기며 [[성노예]]로 학대받는 일이 잦았다. 강간은 로마 사회에서 범죄였지만 일반 여성과 달리 매춘부들은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키케로의 경우 여배우를 집단 강간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른 혐의의 의뢰인을 변호했다. 도시에서 [[창관]]들이 밀집한 유흥가는 '''루파나리움'''(''Lupanarium'')이라고 불렀다. 보통 분주하고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했고, 사람이 하도 많이 다니는 통에 더럽고 비좁았다. 매춘 업소 내부에는 외설적인 벽화들이 가득했으며 손님이 매춘부를 지정하면 그 매춘부가 있는 작은 방 안에 들어가 일을 보는 식이었다. 좁은 방의 문에는 [[분필]]로 소녀의 예명과 가격이 쓰여있었고, 안에는 작고 희미한 조명만이 있었다. 화대는 굉장히 저렴했는데 대부분의 경우 '''매춘부의 화대가 빵 한덩이 가격보다 쌌다.''' 정말 극심한 거지가 아니라면 크게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어서 일반적인 로마 시민들은 매춘 업소들을 자주 이용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HOMAS_COUTURE_-_Los_Romanos_de_la_Decadencia_(Museo_de_Orsay,_1847._Óleo_sobre_lienzo,_472_x_772_cm).jpg|width=100%]]}}} || || '''<로마의 퇴폐>. 토마 꾸뛰르. 1847년 작(作).[* [[로마 제국]] 말기의 지도층의 퇴폐함과 성적 타락을 상징하는 유명한 그림으로 이 그림이 그려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성경]]》의 영향을 받아 로마 제국 시대를 퇴락하고 문란한 사회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한 역사적 관점을 상징하는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다.]''' || 로마 제국 최고의 막장 황제들 중 하나로 꼽히는 게 바로 [[엘라가발루스]]다. 14세라는 역대 가장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라 세상물정 모르고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방탕과 사치를 부리느라 재위 5년도 안되어 보다못한 제 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에게 살해당했는데, 정말 기발할 정도의 성욕과 기행으로 유명하다. >"그는 제 몸 모든 구멍에 정욕을 품었다. 제 저열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보내 [[대물|큰 성기를 가진 남자]]들을 찾아오라 시킬 정도였다... 남자의 성기 크기에 따라 그자의 직급이 결정되었다... 연회장에서 취해 곯아떨어진 친구들을 몰래 끌고가 사자와 표범, 곰 등이 들어있는 방에 처넣은 뒤, 사람들이 깨어날 때 까무러치게 놀라는 것을 즐겼다.[* 이 동물들은 모두 조련되어 있어 실제로 위험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몇몇은 지나치게 충격을 받아 죽기까지 했다...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 [[아우구스투스]]부터 [[누메리아누스]]까지 황제들의 일대기를 기록한 역사서. 단 이 책은 현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위서라고 한다.] 엘라가발루스는 '''[[트랜스젠더]]의 시초 격 인물'''로 불린다. 로마의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양성애자]] 성향이었던 그는 평소 여성의 성기를 가지고 싶어했고, 자신에게 여성기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자에게 제국의 반을 주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어린 나이에 여자와 3번 결혼했으나[* 심지어 개중 두번째 아내는 절대적 순결의 의무가 있는 [[베스타]] 여사제였다. 망나니 엘라가발루스가 그녀를 강간하고 강제로 결혼한 것이다.] 누구와도 아이를 갖지 못했으며 오히려 남자와의 관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그는 눈에 짙은 화장을 칠하고 뺨에 분을 발랐으며 여성의 옷을 차려입고 다녔다. 제 궁전 안에는 남자들과 관계를 가질 별도의 방을 마련했고, 궁전 안 모든 사람들이 제 알몸을 볼 수 있도록 벌거벗은 채로 궁전을 돌아다녔다. 엘라가발루스처럼 막장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동성 연인을 둔 황제는 많았다. 가장 유명한 건 [[오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와 [[안티노우스]]의 로맨스. 안티노우스는 기원후 123년 경 처음 하드리아누스를 만나 뛰어난 아름다움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하드리아누스가 가장 총애하는 애첩이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가는 곳마다 안티노우스를 데리고 다니며 끼고 살았다. 하지만 안티노우스는 130년 경에 이집트 순방 도중 [[나일 강]]에 빠져 익사했다.[* 죽음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가설이 다양하다. 음모에 휘말려 죽었다는 말도 있고, 아니면 나이가 들어 하드리아누스에게 버림받을 걸 두려워해 일부러 젊음을 보존하고 있을때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안티노우스의 죽음을 극도로 슬퍼한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곳곳에 그를 기리기 위한 사원을 세워 [[신격화]]하기까지 했다. 그를 모시는 신앙은 상당히 인기가 많아서 이집트와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안티노우스가 죽고 100년이 흐른 뒤에도 종교가 남아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인 [[티베리우스]]도 이쪽과 관련된 일화가 많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카프리 섬에 들어박혀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는데, 고립된 섬에 괴팍한 황제가 주구장창 죽치고 있으니 당연히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체 황제가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까 소문이 무성했다. 특히 [[소아성애]]와 관련된 소문이 많았다. 티베리우스가 목욕탕에 들어가 있으면 어린 소년들이 그의 허벅지 사이를 헤엄치고 그의 성기를 빨도록 훈련시켰다는 소문, 카프리 섬의 황궁 벽에는 온통 음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소문, 3명의 [[미소년]]들을 한 조로 짜서 그 앞에서 [[쓰리썸|한꺼번에 교합하도록]] 시켰다는 소문, 두 미소년을 강제로 취한 뒤 그들이 불평하자 다리를 부러뜨렸다는 소문 등 거의 [[괴담]] 수준으로 그에 대한 악소문이 넘쳐났다.[* 참고로 위의 소문들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 이 소문들을 남긴 인물은 수에니토우스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열렬한 공화국 지지자로 로마 제국의 황제들을 극도로 증오했기 때문에 현재에 와서는 이 사람이 쓴 역사책의 내용에 대해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 티베리우스는 그런 소문은 있었을 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철혈 황제로 매우 인내심이 강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동성애는 아니지만 [[근친]] 의혹이 있었던 황제도 있다. 네로와 함께 로마 폭군의 양대 산맥인 [[칼리굴라]]는 유난히 3명의 여동생들을 총애한 것으로 유명했다. 개중에서도 여동생 드루실라를 매우 마음에 들어해 그녀를 항상 연회에서 곁에 앉히고 심지어 여신으로 부르도록 시켰다는 속설이 널리 퍼졌다. 근친상간에서 풍기는 부도덕성이 칼리굴라의 폭군 이미지와 기가막히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 대부분은 이걸 사실로 믿었다. 다만 현대 들어 로마 사학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칼리굴라가 여동생들을 성적으로 좋아했다는 말은 아무런 근거가 없고, 오히려 칼리굴라의 정통성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깎아내리기 위한 음모론에 불과했다는 설이 주류다. 칼리굴라를 지나치게 악마화하는 과정에서 근친상간이라는 자극적인 요소를 집어넣었다는 것. 로마 시대의 개방적인 성문화는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쭉 유지되었다. 얼마나 개방적이었는지 '''[[창녀]]가 황후의 자리까지 오른 사례'''도 있었다. 동로마 최고의 성군들 중 하나로 불리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아내 [[테오도라(6세기)|테오도라]] 황후가 바로 그 주인공. 그녀는 어릴 적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콘스탄티노플]]의 술집에서 춤을 추고 몸을 팔기도 했는데, 타고난 아름다움과 압도적으로 명석한 두뇌로 결국 유스티니아누스와 결혼하여 황후라는 최고의 신분까지 올라갔다.[* 테오도라 황후는 로마 역사상에서도 손꼽힐만큼 영리한 황후이자 [[여장부]]로 유명하다. [[니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겁먹은 황제가 항구로 도망치려 하자 오히려 그를 꾸짖으면서 당장 돌아가 반란을 진압하라고 설득했다는 일화가 있다. 정치적으로도 대단히 유능해 그 누구보다 황제에게 신임받았던 인물이다. 어렸을 때 비참한 경험을 잊지 않고 창녀들의 처우 개선에 힘쓰기도 했다.] 그녀가 어린 시절 가장 즐겨 공연하던 내용이 바로 '[[레다]]와 [[백조]]'다. 그녀가 헐벗은 채로 누워있으면 동료들이 그 사타구니에 [[보리]] 낱알을 뿌렸다. 그러면 [[백조]][*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백조로 변신해 그녀와 아이를 가진다.]가 그녀의 사타구니에 흩뿌려진 보리알들을 쪼아먹는 게 공연의 하이라이트. 그 외에 공연장 위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동료 배우들과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흔히 로마식 연회하면 [[난교]]와 온갖 음란한 짓거리가 벌어지는 퇴폐적인 장소를 떠올리기 쉬운데, 실제로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 이런 연회를 실제로 주최한다고 할지라도 공개적으로 벌어지는 일은 절대 없었고 사적으로 비밀리에 은밀한 취향으로만 남았다. 그나마 이런 난잡한 연회를 주최한 황제가 [[칼리굴라]]나 [[엘라가발루스]] 정도인데, 성적 타락에 가까운 연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이런 지나칠 정도의 성적 탐닉은 그 당시에도 좋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검투사]]들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았다. 당시의 최고 연예인이자 [[아이돌]]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 고위 계급의 여성들이 말그대로 검투사들에게 환장했다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유명 검투사들과 같이 잠을 자고 싶어했고, 종종 엄청난 거금을 지불하고 하룻밤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 로마의 시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는 이피아라는 원로원 의원의 아내가 검투사와 함께 도주한 일화를 시로 적기도 했으며 저명인의 아내가 검투사와 잤다는 [[스캔들]]이 터지는 경우도 흔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내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검투사들과의 불륜으로 유명했는데, 하도 아내의 성욕이 심하자 보다못한 황제가 아내의 불륜 상대 검투사들을 죄다 죽여버리고 그 피로 아내를 목욕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자 더이상 검투사들과 놀아나지 않았다고. 다만 이 이야기가 신빙성은 거의 없는 뜬소문이기에 흥밋거리 정도로 귀흘려 들으면 된다. 어쨌든 당시에 우람한 근육질 몸매를 가진 검투사들이 성적으로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